
김세은
<이사하는 날>
39.4x54.5cm
종이에 색연필 채색, 펜
2026

“이사하는 날”의 시작은 김정기 작가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루라는 시간 안의 사람들을 하나의 장면에 포착하는 다면성과, 산발적이나 결국 하나의 길로 귀결되는 구도의 다양성이 “이사”라는 행위와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정기 작가가 “14년 뉴욕 코믹콘에서 테이블에 앉아 그린 작품이다. 오픈하기 전날 분주하게 짐을 옮기는 사람들과 풍경을 모티브로 그렸다.”라는 설명과 함께 별다른 제목 없이 게시한 작품에서는 현장이 느껴진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조연출의 무전기 소리, 낡은 캐리어 모서리에 청테이프를 붙이는 스태프들, 각종 판넬에 치여 언짢은 배송 기사와 캐릭터 복장을 하고 현실과 무대 사이에 걸쳐 있는 참가자들. 리프트의 기계음과 다양한 동물에 비유된 작업반장, 거리예술가, 공사장 인부.. 헤드셋을 목덜미에 반쯤 걸치고 카메라를 드는 카메라 감독 옆에는 지게차를 모는 운전기사가 있고, 배우와 코미디언 사이를 수많은 사람과, 물건과, 어지러운 전선들이 메운다. 그러나 김정기 작가의 이러한 산발적인 묘사는 어지럽다는 인상을 넘어 통일성을 주기까지 한다. 8절지 안에 등장하는 10명 이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하나의 상황 속에 존재한다. 다른 시간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지만,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공통의 일로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김정기 작가는 유독 “상황”을 묘사한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름날의 오후. 명절 전날 귀성객과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시장 바닥. 모든걸 있는 그대로, 모두 그려내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건,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지를 알게 하는 생명감 있는 형태이다.
서 있는, 멈춰있는,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하나의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행동하는 다양한 변주가 좋아 참고 작품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화곡동이다. 나의 4살, 5살, 6살의 절반 정도가 화곡동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 속 어딘가의 옥상에서 남산을 바라보는 인물은 시간이 오래 흘러, 유년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다시 화곡동 어딘가의 오래된 빌라로 돌아온 나이다. 통일성 없는 빌라, 가로수보다는 터줏대감에 가까운 나무들, 구식 아파트와 신설된 초등학교 모두 기억 속의 화곡동을 바탕으로 일말의 각색을 해 그렸다. 요즘은 ‘재개발’이란 단어가 너무 흔해진 세상인 것 같다. 오래된 것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 새것으로 바꾸고 싶어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들, 그 장단에 맞추는 기업과, 언론들. 며칠 전 우연히 지난 화곡동 일부분은 이미 재개발의 명목으로 흰 천을 뒤집어쓴 창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멀쩡한 나무를 뽑고, 공원의 조성하기 위해 다시 나무를 심는다. 기억 속의 화곡동과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달라진 모습을 보며 부러 촌스럽고, 옛 티 나게, 어린 내 머릿속에 들어있던 정감 가는 모습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흠집 하나 없는 프리미엄 포장이사 대신
부직포와 카페트와 과일박스로 싸여진 짐들이 이삿짐 트럭에 실려 오면,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위로 물건들이 쌓인다. 한쪽으로 상자들을 물린 다음 중국집 전단지를 뒤적거려 짜장면을 시키고, 바쁜 배달기사를 위해 다 먹은 그릇은 잘 씻어 문밖에 내둔다. 이사 1일 차의 어수선한 집안을 뒤로하고 옥상에 오른다. 저무는 날을 배경으로 남산타워가 보이는데, 어딘가 기분이 상쾌하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부터 왼쪽 위로 올라가며 이사하는 하루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가가 나서서 말하지 않아도, 관람객이 캔버스 옆 설명란을 참고하지 않아도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의 시선 방향이 모두 다르고, 이삿짐 트럭은 위로, 중국집 배달기사는 오른쪽 아래로, 나의 시선은 저 너머 남산을 향한다. 보는 사람에게 내 유년기의 일부분을 차지한 동네를 소개하고 싶었고, 그래서 눈길이 그림 구석구석에 가 닿도록 의도해 설계했다. 작품 곳곳에 유독 작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트럭 위에 올려진 사과박스, 빌라 옥상의 초록 방수페인트, 장독대, 난초가 그려진 오래된 화분과 더 오래된 고철 자전거.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을을 빤히 쳐다보는 시간을 들였다. 현실처럼, 내 주변처럼 그리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살아보았던 옛 동네를 떠올리거나, 오래된 것들의 따듯함을 발견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껴보았으면 더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순간을 포착한다는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이 보느냐가 아닌, 누구를 보느냐,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애정 있는 시선. 그것이 누구나 한 번쯤 겪었던 이사하는 날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이다.